2011.06.03 03:02



회방연은 생원, 진사시나 문과 등의 과거에 급제한 후 60년이 지난 뒤에 열리는 잔치이다. 

회갑은 태어나서 60년을 기념하는 것이니 예순에, 혼인을 대략 열다섯에서 스무 살에 하니 회혼례는 대략 일흔 살에서 여든 살 사이에 할 수 있었겠지만, 회방연은 문과 급제의 평균 나이가 30대 후반임을 고려한다면 거의 아흔 살이 되어야 가능했다. 그러니 실제 문과 급제로 회방연을 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좀 더 젊은 나이에 합격하는 소과인 생원, 진사시 합격자의 회방연이 그나마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해동죽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옛 풍속에 과거 창방한 날이 다시 돌아 일갑이 되면, 어전에서 다시 홍패를 내리고 사악과 사개의 영광이 있었다. 또한 다시 일급을 더해 주고 조정에 와서 솔방을 하는데, 이름을 ’회방 잔치’라 한다. 

현대 전해지는 회방연과 관련된 그림 가운데에 <만력기유사마방회도첩>이 있는데, 이 그림은 광해군 원년에 사마시, 즉 생원, 진사시에 급제한 사람들이 60주년을 맞아 현종 10년에 회방연을 개최한 사실을 기록한 화첩이다. 회방연에 참석한 이는 당시 생존자로 여든하나인 전 이조참판 이민구, 아흔하나인 동지돈녕부사 윤정지, 여든다섯인 동지중추부사 홍헌 등 세 사람뿐이다. 

모임 장소는 장원으로 합격했던 이민구의 집이다. 대문 밖에는 연회에 참석한 이들이 타고 온 말과 초헌이 보인다. 초헌은 종 2품 이상의 벼슬에 있는 사람이 타는 수레였으니 이 잔치에 모인 사람들의 직급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마당의 넓은 공간에는 차일과 병풍을 설치하고 헝겊으로 가장자리를 꾸미고 여러 개를 마주 이어서 만든 돗자리인 지의를 깔았다. 차일 아래에 북쪽에는 회방자 세사람이 앉아있고 맞은편에는 이경석을 비롯해서 잔치에 참석한 사람 다섯이 앉아 있다.

노란색 관을 쓴 무동 둘이 춤을 추고 기녀 다섯과 악공 넷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술시중을 드는 시종들의 위로 올려 묶은 머리 모양이 특이하다. 이 그림은 대문 밖 정경까지 포함시킨 화면 구성, 한쪽으로 치우쳐 잡은 연회석, 둥글고 단순한 차일의 형태등 17세기의 ’사가행사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문자 급제자로 60주년을 맞은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숙종실록>을 보면 숙종이 급제한 지 60주년이 되는 지중추부사 이광적에서 쌀, 고기, 베, 비단 등을 내리고 있다. 숙종은 이광적에게 어사화를 다시 내리기도 했다.

숙종이 하교하기를 "급제한 지 회갑이 되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이므로 참으로 귀하게 여길 만하다. 옛 일을 본떠 우대하는 특전을 보여야 하니, 지사 이광적에게 꽃을 만들어 내리라"고 했다. 이광적이 드디어 꽃을 머리에 얹고 전문을 받들고서 대궐에 나아가 배사하니, 임금이 선온을 내려 수고한 것을 치하했다. 한때 전하기를 성대한 일이라 했다.

이광적이 어사화를 꽂고 임금인 숙종에게 사은하고 있다. 회방을 맞은 이에게 어사화를 내린 경우는 송순에게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이광적인 어사화를 받은 일은 후에 선례가 되어 회방을 맞은 이들을 대우하게 되었다. 정조 10년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지사 강항이 화모에 공복을 갖추고 와서 사은했다. 삼가 숙조께서 지은 <고 판서 이광적에게 하사하다>라는 시에 차운하여, 각신 정대용에게 명하여 펼쳐 읽고서 하사하게 했다. 또 내구나, 내취, 무동 및 화개를 하사했는데, 화개는 그대로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영광을 빛내도록 했다. 이어서 무과 회방인 서정문의 집에서 회연하라고 명했다.

이렇게 회방을 맞은 강항이 사은을 하자 이광적의 고사가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무과 회방인 서정문의 집에서 잔치를 열게하고 있는데, 문과와 무과 모두 회방연을 하도록 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숙종은 내사복시에서 기르던 말인 내구마, 선전관청에 딸린 악사인 내취 그리고 무동 및 육각 모양의 햇빛 가리개인 화개를 하사했는데, 회방을 축하하는 유가를 하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회갑과 회혼례 그리고 회방연을 모두 행할 수 있던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있었을까? 많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장수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식도 모두 탈이 없어야 했으므로 실제로 이 세 가지를 모두 경험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을 것이다.

<계서야담>에는 회갑과 회혼 회방을 모두 치른 이로 선조 대부터 효종 대 까지 살았던 심액을 들고 있다. 
심액은 선조 2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6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면서 벼슬살이를 시작해 1647년 형조, 예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청송군에 봉해졌으며, 효종 3년 판의금부사로 기로소에 들어간 인물이었다. 그는 나이 여든이 넘어서 회혼과 회방연을 치렀는데, 이때 큰 아들 심광수는 승지이고, 둘째아들 심광사는 벼슬이 종친부의 종 5품인 전부였다. 심액은 손자가 일곱 명이었고 문과 급제자가 다섯명이나 되었으며, 내외의 자손을 합쳐 칠십여 명이었다고 한다.

심액을 조상으로 둔 문중 사람들은 친족계인 화수계를 맺어 각자의 생일날이면 술과 안주를 차려 놓고 심액의 앞에서 축수를 했다 한다. 그런데 이런 날이 열두 달 중에 거르는 달이 없었고, 어느 달에는 겹쳐 행할 때도 있었다 하니 세상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워했을까.


출처 : 옛 그림속 양반의 한평생  저자 : 허인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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