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19 05:37

1 장 우리 복식의 형성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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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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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 복식의 원류를 시작으로 여러 부족국가 시대의 복식과 삼국 시대의 복식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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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고대 우리 나라의 민족적 환경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그것은 주로 지리적 관계에 의한 것으로 숙신족, 선비족, 돌궐족, 한족등 역대로 번갈아 가며 나타나 우리 민족과의 접촉이 빈번하였다.

신라 삼국 통일 이전의 우리 나라는 여러 부족국가로 분립되고 경계가 구분되어 있었던 까닭에 다른 민족과의 접촉면도 자연히 그 국가에 따라 달랐다.

 

고조선은 서부 일대로부터 남부 일원에까지 걸쳐있어 중국 본토의 망명객들을 받아들이면서 그 문물을 흡수하여 당시 가장 개명된 나라였다.

고조선은 망명인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겨 잠시 위만이 군림하는 시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곧 한의 무제에게 패망하여 한사군의 설치로 소멸되고 말았다. 이후, 부여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고조선의 후계자로서 북방의 말갈, 선비와 남방의 한사군의 수군격인 낙랑등 외족과 치열하게 교섭했다.

낙랑을 주축으로한 한사군은 한때 그 위세를 떨쳤으나, 당시 삼한 (진한, 마한, 변한)은 남부에서, 예맥은 동부에서, 옥저는 동북에서 각각 세력을 키워 가고 있었고, 고구려는 북부에 웅거하고 있어 끝내 지탱하지 못하였다.

낙랑은 고구려의 미천왕에게 멸망 당하기까지 한,,진 삼대에 걸쳐 400년 동안이나 존속하여 한반도 내의 한족의 근거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낙랑에서 꽃피었단 현란한 낙랑문화가 고구려에 미친 영향은 오히려 그들 본국인 중국으로부터 받은 것보다 더 지대하였다.

 

한편 고구려는 요동 및 요서지방에서 직접 중국본토와 접촉하며 한, , 연과 싸웠고, , , , , 북제 등 남.북조 여러나라와는 화빙관계를 맺으면서 수, 당과 벅찬 싸움을 치르기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문화가 고구려 땅에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왔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대륙으로의 문호였던 관계로 외족과의 접촉이 가장 많았으며, 그렇게 소화된 외래문화는 한반도 여러 나라의 문화 발달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 후 백제나 신라도 이족과 직접 교섭했는데, 그 외부문화의 직수입은 우리 나라 문화에 현저한 영향을 미쳤다.

 

백제는 시조왕부터 무령왕 대에 이르기까지 약 500년 간 말갈과 투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 전반에는 낙랑, 대방과도 접촉이 빈번하였다. 또한 수, 당과도 활발이 왕래하였으며 이에 따라 대륙문화의 백제로의 이입은 고구려 못지 않았으며, 남조와의 교섭은 오히려 고구려보다도 깊었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이족과의 접촉이 비교적 적어 대륙문화의 흡수도 뒤떨어졌으나 낙랑과 말갈과의 접촉은 물론, 중국과는 내물왕 대에 부진에 초사를 보냈고, 법흥왕 대부터는 양, 북제, 진 등과 교빙하였으며, 진평왕 대 이후로는 수, 당과 빈번하게 왕래하였다. 특히 선덕여왕 대부터 태종 무열왕대에 이르는 약 40년간은 신라의 친당 정책 최고조기로서, 고구려나 백제 이상으로 당의 문화를 흡수하였다.

 

이처럼 이족과 교섭하면서 직,간접적으로 받아들인 문화 가운데에는 복식에 관한 것도 있었을 것이니, 고대사회의 복식을 알아봄에 있어 우리는 또한 이 점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가운데 신라는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당제 관복제도를 들여와 그대로 습용하였으니 이로부터 우리의 복식제도는 고유 복식과 중국복식의 이중구조를 갖게 되었다.

 

 

 

고대 사회 복식은 옛 기록이나 고분벽화 및 출토된 유물에서 그 모습의 일면을 알아볼 수 있으나 신라 통일기 이후 고려에 원 복속기 까지는 옛 기록이 너무도 단편적이고 도상도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다.

고려에서 조선조 근세에 와서는 남아있는 회화나 문헌 그리고 유물이 있기는 하나 변천 과정을 뚜렷이 가려내기는 미흡하며 앞으로 보다 많은 자료수집과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스키타이 인물상

 

<우리 복식의 원류>


우리의 복식은 북방계의 옷이며
그 원류는 스키타이계 복장으로
(
:저고리)와 고(:바지)이다.

상의와 하의로 구성된. 밀착된 형태의 복장.
좌로 여미게 되어있으며. 허리 부위에는 띠를 매게 되어 있음.

















신석기 시대
주로 피의(
皮衣)를 입었으리라 생각.

                  가죽의 가공방법은 방직보다도 먼저 생긴 기술로, 마석제 초퍼나 스크레이퍼 등의 유물들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

                  신석기 유적에서 마사가 붙은 골침을 비롯한 각종 대,소형 골침 들이 출토되어 당시 이미 간단한 방직방법으로 직물을 짰으며 또한 어느 정도 재봉된 옷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



청동기 시대 보다 완성된 유고(저고리,바지)제의 기본양식이 스키타이계 복장에서 이루어짐.

                 고대 우리나라는 중국문화권으로의 방향전환의 계기가 된 한군현의 설치 이전에는 북방 유라시아 전역에 퍼져 있던 스키타이계 문화권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


스키타이계 복장 -스키타이라는 명칭은 기원전 7~3세기에 걸쳐 흑해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유목기마 민족을 지칭. 스키타이계 문화는 유목을 위한 이동생활이나 기마활동 등 유목 기마민족 특유의 환경적 요청에 맞추어 창조되었음.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친 스키타이계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복식 양식들인데, 유고제의 복장은 고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대다수의 일반인들이 착용하여 예복이나 관복으로 사용된 중국 복식과 이중 구조를 이루었다.

                   스키타이계 복장은 중국 기록에 의해 호복(胡腹)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움.

                   상의와 하의로 구성된. 밀착된 형태의 복장.

                   좌로 여미게 되어있으며. 허리 부위에는 띠를 매게 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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