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12 20:51

 

 

예송은 현종, 숙종 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 비에 대한 조대비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복상 기간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 간의 논쟁을 말한다. 이 논쟁은 표면적으로 단순한 왕실의 전례 문제인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예를 최고의 덕으로 여기던 성리학의 핵심 문제이다. 또한 왕위 계승 원칙인 종법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된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 간의 정권 주도권을 둘러싼 이념 논쟁이었다.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복제 문제로 인한 남인과 서인의 예론정쟁에 휩싸였다.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장렬왕후 조씨)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정쟁화된 것이다.

이 무렵 조선 조정은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과 인조의 중립정책으로 기용된 남인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인조, 효종 대에 남인은 주로 영남학파의 주리론을 주장하고 서인은 기호학파의 주기론을 주장하는 학문적인 대립을 벌였으나, 현종 대에 와서는 본격적인 정치 논쟁을 일삼곤 했다. 예론 역시 처음에는 학문적인 대립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정쟁으로 확대된 사건이었다.

 

당시 조선의 일반 사회에서는 <<주자가례>>에 의한 사례의 준칙이 지켜지고 있었지만, 왕가에서는 성종 때 제도화된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국조오례의>>에는 효종과 자의대비의 관계와 같은 사례가 없었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에 있었다면 별문제가 없었겠지만 그가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 상을 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당연히 기년상(1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결국 효종의 상중에 일어난 이 논쟁에서 서인의 기년상이 채택됨으로써 남인의 기세는 크게 꺾였다. 그럼에도 남인의 반발이 심상치 않자 1666년 현종은 기년상을 확정지으며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말 것을 엄명했고, 만약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는 포고문을 내렸다.

 

그러나 복상 문제는 1673년 효종 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이번에도 서인측은 효종이 차남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대공설(9개월)을 내세웠고, 남인측은 그녀가 비록 자의대비의 둘째 며느리이긴 하나 중전을 지냈으므로 큰며느리나 다름없다면서 기년설(1)을 내세웠다. 현종은 이때 남인측의 기년설을 받아들여 자의대비로 하여금 기년 복상을 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서인은 실각하였고, 현종 초년에 벌어진 예론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겉으로 보기에 단순한 학문적 언쟁인 것 같지만 깊이 파고들어 보면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묻는 문제이기도 하였다.

인조는 장자인 소현세자가 죽자 세손이 아닌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다. 당시의 왕위 계승법에 따르면 당연히 소현세자의 첫째 아들인 석철이 왕위를 이어야 했지만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증오감 때문에 이 법을 어긴 셈이었다.

그런데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현종이 왕위를 잊자, 이때 효종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 기간이 문제가 되었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부모가 죽었을 때 장자는 3년상, 차자 이하의 아들은 기년상을 치러야 옳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서인과 남인의 해석이 엇갈렸다.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측은 조대비는 효종의 어머니이므로 신하가 될 수 없으며, 효종은 조대비에게는 둘째 아들이므로 차자로서 기년상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또 비록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하더라도 사종지설(왕위를 계승하여도 3년 상을 할 수 없는 경우) 중 체이부정(적자이면서 장자가 아닌 경우)에 해당되어 기년상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반면에 남인들은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긴 하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자로 대우하여 3년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 이들은 누구든지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신하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해석 차이는 <<주자가례>>에 입각하여 왕이든 일반 서민이든 모두에게 종법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는 수주자학파와, <주례>,<의례>,<예기> 등의 고례에 입각하여 왕에게는 일반인과 똑같이 종법을 적용할 수 없다는 탈주자학파 사이의 이념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기호학파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서인과 영남학파에 기반을 두고 있는 남인에 의한 일대 학문적 해석 차원의 이념 정쟁으로서,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논쟁이었다.

 

그 후 예송은 누그러졌다가 1674년 정월 효종 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효종 비를 장자부로 보면 기년상이로, 차자부로 보면 대공상(9개월)이었다. 또한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큰며느리든 둘째 며느리든 모두 기년상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래서 서인 쪽에서는 이번에도 1차 예송 때와 마찬가지로 효종을 차자로 다루었기 때문에 효종 비도 차자부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공설을 내세웠고, 남인 쪽에서는 효종이 왕위 계승권자임을 들어 장자부로 다루어야 한다며 기년설을 주장했다. 말하자면 제 1차 예송전의 반복인 셈이었는데, 이 사건을 제 2차 예송 또는 갑인예송이라 한다.

 

예송은 이처럼 단순한 복상 논쟁이 아니라 학문과 사상을 매개로 한 일대 정쟁이었다. 말하자면 17세기 율곡학파로 대표되는 서인과 퇴계학파로 대표되는 남인이 예로써 다스리는 이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그 실현 방법을 둘러싸고 전개한 성리학 이념 논쟁으로, 조선 후기의 가장 이상적인 정치 형태였던 붕당정치를 대표하는 정치사건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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