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05 00:22

 

16세기 출토 여복의 복식사적 고찰 - 요약 및 맺음말


본 연구는 2003년 10월 현재까지 발굴된 16세기 출토 여복을 중심으로 복식사에 충실하여 고찰한 것이다. 묘주의 몰년을 임진왜란 (추정연대 포함)까지 제한하여 총 26건의 발굴자료 중 일선문씨, 청주한씨, 은진송씨, 파평윤씨 묘 복식류가 선별되었다. 일선문씨 이외에는 모두 상류층의 신분복식이므로 결과적으로 상류층의 복식류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 복식류는 선조비 의인왕후 및 인목왕후의 염습의대 평상복 기록내용과 상당부분 일치하였다. 이와 함께 장속을 고려하지 않고 출토된 복식을 묘주용으로 보고함에 따라 성별이 다르게 지정된 복식(철릭)이 포함되어 있었다. 남자 분묘에서 발굴된 여복(배위용 추정)도 대상에 포함하였다.

출토된 복식은 장의, 단령, 장삼의 포제류와 다양한 형태의 저고리류, 의례용 치마와 평상용 치마, 바지 등이다. 복식고증에 혼란을 보인 것은 장의였으며 대부분 직령으로 보고 되어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연구된 결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포제는 장의로 대표된다. 장의는 길 쪽으로 들여 달린 목판깃과 2개의 섶, 거들치, 겨드랑이 아래 삼각무가 달린 좌우 대칭형을 특징으로 한다. 후기와 달리 포제로서 기능하여 사계절용으로 착용하였으며 왕비의 경우도 동일하였다. 장의의 조형적 특징은 깃달이를 제외하면 저고리 구성과 유사하다. 출토된 장의는 여자 저고리의 경우처럼 화문단을 사용하거나 장식 유뮤에 따라 구분되었다. 당시 남녀의 복식은 활대(闊大)하게 만들어진 특징 때문에 남녀 공동 착용 복식의 경우 옷의 크기로 남녀용을 구분 할 수는 없다. 저고리와 같이 특정부분에 장식한 것은 여성용으로 구분 가능하였으나 하절용 홑장의나 일선문씨 같은 경우와 같이 서민용으로 소박하게 만든 것은 적용할 수 없는 예외의 경우가 있다.


2. 수의용 상복(上服)으로 출토된 여성용 단령이 확인되었다. 명대의 자료나 출토 단령의 구성적 특징을 고려한다면 여성용 단령의 착용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모두 수의용으로 출토되었고 여성의 단령 착용과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이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새로 제시된 죽산이씨(미발표), 전주최씨(미발표) 수의용 단령은 이미 발표된 자료와 구성적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장속 중에 성별이 다른 옷을 수의로 입히는 ‘남상불습여복’ 이나 ‘여상불습남복’이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추가 자료가 확보, 비교되어야 한다.


3. 장삼 역시 현재까지 1건 밖에 보고되지 않은 상황이므로 추가자료가 확보될 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4. 저고리류는 가장 많은 양이 출토되었다. 여자 저고리는 외의적 기능으로 착용되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형태의 저고리가 포함되어있다. 목판깃 저고리는 당시 여복 저고리의 특징이며 길이에 따라 다양한 구성을 보인다. 따라서 이들을 단저고리형, 중저고리형, 장저고리형으로 나누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구성적 특징을 알아보고 당시의 명칭과 비교하였다.

단저고리형에는 깃, 섶, 액간, 끝동 등에 금선단이나 문단 등 갈변된 옷감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섶 장식을 제외하면 현재 삼회장저고리와 유사한 형태이다. 금선단 저고리 중에는 섶을 저고리와 같은 옷감으로 하여 현재의 삼회장저고리와 동일한 형태도 포함되어 있다. 이외에 액간의 장식을 제외하거나 깃만 갈색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으며 민저고리 형태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의 명칭으로 ‘장저고리’와 구분하여 작은 저고리, 소저고리로 불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왕실 기록은 문헌마다 차이를 보이지만 단저고리, 소고의, 소오자 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세속의 제도가 반영된 의인왕후, 인목왕후 염습의대에만 회장저고리, 소저고리등 구체적인 표기가 보인다.

중저고리형에는 금선단 대신 갈변된 문단이나 명주로 장식된 저고리가 있다. 당시 크고 넓은 저고리 구성상 명주나 무명, 모시 등 좁은 폭으로 제작되는 경우 ‘곁막이’ 부분은 남녀 저고리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부분이며 여자 저고리의 특성상 장식된 부분이 확인된다. 이에 근거하여 단저고리형이 아니면서 옆트임이 있는 장저고리를 제외한 장식 저고리는 ‘곁막이’로 볼 수 있다. 의인왕후 염습의대에는 곁마기, 인목왕후는 액마기로 표기되어있다. 이는 후기 방막기, 곁막기 말기에는 견막이로 표기되기도 한다. 칼깃이 달린 남자 저고리가 포함되며 겨드랑이 사이가 비대칭으로 바느질된 경우도 있고 민저고리도 포함되어 있다. 그밖에도 여성용으로 보이는 좁은 직령깃 화문사 홑적삼이 있으며 합장묘에서 출토된 모시 홑적삼의 경우 겨드랑이가 비대칭으로 연결된 경우도 있어 여러 가지의 저고리류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 다양한 계층에서 일상적으로 입을 수 있었던 남녀 저고리가 이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장저고리형길이가 길 뿐만 아니라 양 옆이 트이고 화장이 길어 표의적 기능이 있다. 트임은 구성상 필요한 부분이므로 남자 저고리에도 해당한다. 금직 또는 금박으로 화려하게 만들어진 당저고리(당의), 갈변된 목판 깃이 달린 장저고리는 문헌에 보이는 ‘고의’의 특징을 보인다. 이밖에도 거들치형 넓은 끝동이 달린 장저고리, 민장저고리로 대별된다. 경주정씨 저고리는 옆트임 민장저고리로서 남성용 저고리도 포함된다. 파평윤씨 저고리 중 화문사 혼 장적삼은 좁은 깃이 달린 유일한 형태이다. 이밖에도 파평윤씨 유물에서는 예외의 경우가 나타났으며 저고리 중에는 은직(銀織)으로 장식된 저고리가 포함되었다.


상기와 같은 특징 외에도 깃이 섶 밖에 내어 달리거나, 섶에 걸친 경우가 동시에 보였으며 액간의 장식은 파평윤씨 묘 발굴 이전에는 단저고리형에는 사다리꼴과 소형 삼각무의 두쪽 무가 특징이었으나 파평윤씨의 경우는 한쪽 무의 경우가 많이 보였다. 중저고리형에는 2가지 형태가 공존하며 장저고리형은 한쪽 무로 통일되어 있었다. 저고리 수구 안쪽에는 안단처럼 성글게 별도의 옷감으로 처리한 부분이 확인되며 이는 오염을 방지하기 위한 실용적인 구성으로 보인다. 그밖에 한삼과 적삼의 구분이 애매하여 본고에서는 편의상 자색비단 적삼 기록에 의거하여 깃이 좁은 비단 홑저고리를 ‘적삼’으로, 흰색 홑저고리를 ‘한삼’으로 분류하였다.


5. 16세기 치마의 특징은 의례용과 평상용으로 구분되어 나타났다.

의례용 치마는 전단후장의 홑치마로 앞길이는 본인의 신장에 맞추고 뒷길이는 앞보다 길게 하는 등 서양복의 버슬 스타일과 유사한 조형적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치마는 상류층 여성 분묘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양식으로 은진송씨, 남양홍씨 배위, 파평윤씨의 유물이 있다. 또한 스란치마는 청주한씨와 남양홍씨 배위용으로 출토되었으며 파평윤씨, 양천허씨를 포함한 여성용 치마에는 문단, 초, 명주, 무명, 모시 등의 의차로 다양하였으며 무명을 제외하면 의인, 인목왕후 <빈전도감의궤>의 치마소재와 동일하다.

치마의 여밈은 착장상태를 기준하여 오른쪽 여밈이 많이 보였으며 주름의 방향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잡힌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파평윤씨의 경위는 주름의 방향이 오른쪽으로, 왼쪽 여밈이 공존하여 예외의 경우로 나타났다. 이외에도 치마 하단을 접어주어 길이를 짧게 조정한 치마가 일선문씨와 파평윤씨의 유물에 포함되어 있었다. 실용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만든것인지, 2벌로 겹쳐 입을 때 겉치마용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6. 조선 전기 출토 바지는 중심에 트임이 있는 개당고형 바지와 막힌 합당고형 바지로 대별되며 그 외에 방한용을 목적으로 제작된 세가랑이 솜바지가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남녀공용으로 착용 되었으며 사폭으로 구성되는 남성 전용의 사폭바지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확인된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전의 바지를 남녀용으로 구분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여성의 염습의 과정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분묘 중 일선문씨는 합당고형 5점, 개당고형 2점을 습의로 사용하였다. 파평윤씨는 2개의 바지를 습으로 입었으며 합당고형 바지를 속에 착용하였다. 기타 세가랑이 바지는 남양홍씨 합장묘, 나주정씨 합장묘, 고운 쌍분묘, 벽진이씨 등에서 출토되었다. 대부분이 남자 분묘이거나 남녀복 구분이 되지 못한 합장묘에서 출토되었다. 성별 구분이 모호하나 바지의 남녀공동 착용설에 근거하여 여자도 착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성의 바지는 후기까지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전래되는 전통성을 보였다.


7. 현재까지 출토된 너울은 경기도박물관 소장의 여흥민씨 유물과 파평윤씨 유물 2점이다. 인조장열후 <가례도감의궤>와 <원행을묘정리의궤>를 기준으로 했을 때 파평윤씨 너울은 매듭과 드림 장식까지 갖춘 거의 완형의 수준으로 보인다. 내외법이 성행되었던 시대의 유물로서 가치가 높다.


16세기 출토된 여자 복식은 치마와 저고리 중심의 구조를 보여 저고리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신체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크고 넓게 만들어 경우에 따라 장옷 위에 착용되기도 하였다. 여기에 유소와 드림이 있는 너울을 쓰면 당시 여성들의 외출 모습이 재현된다. 장의, 저고리, 치마, 바지 일습은 당시 여성들의 일반적인 차림새였으며 스란치마를 비롯하여 출토된 소재와 색은 왕비의 경우와 동일하였다. 상류층의 여인들과 유사하였으며 의례용 치마류는 왕비도 착용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당시의 조선 사회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대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정성으로 만들어진 누비옷을 비롯한 정교한 바느질과 세련된 디자인에서 격조 높은 여인들의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으며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파평윤씨 모자 미라 종합 연구 논문집 중 <16세기 출토 여복의 복식사적 고찰>

박성실

단국대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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