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04 23:48

 

 16세기 출토 여복의 복식사적 의의


현재까지 발굴된 16세기 여성 복식은 복식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외에도 당시 사회상까지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16세기는 연산군, 중종, 인조, 명종, 선조의 다섯 임금의 치세시기이다. 금번 연구대상 묘주 가운데 생몰년이 밝혀진 경우는 좌찬성 나주정씨 배위 정경부인 은진송씨가 유일하며 중종 4년 (1509)에 태어나서 선조 13년 (1580) 72세로 졸하였다. 영의정으로 추증된 남편 보다 8년을 더 살다간 인물이다. 그 외의 출토복식은 몰년이 추정으로 밝혀지거나 남편의 생몰연대 또는 복식유물에 나타난 특징을 통하여 추정되었으며 이들 복식류들은 서로 공통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음은 확인된 바 있다. 이들 출토여복의 의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여성의 지위 -아들처럼 대우 받고 친정에서 신접살이-


조선시대 여성은 유교적인 윤리규범으로 ‘남존여비’와 ‘삼종지도’를 지키도록 강요받고 이에 순종하며 생활한 고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죽하면 여성들의 한은 민요나 내방가사에 ‘인생에 생겨날 제 남자로 생겨나서 글 배워 성공하고 활 쏘아 급제하여....’ ‘전생에 무삼죄로 여자몸이 되어 부모동기 멀리하고 생면부지 남의 집에...,.,’ 등으로 남아 전해진다. 그러나 조선 초기는 후기와 달리 재산 상속이나 제례 등에서는 남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음이 확인된다.

<경국대전>에는 상속과 관련하여 딸에게도 평분토록 하였다. 또한 조선 초 분재기에는 자녀간에 균분상속이 이루어져 딸이나 사위에게도 동일하게 분배되었다. 또한 당시 혼속에는 처가에서 자녀를 낳아 성장한 후에 남편 집으로 이주하여 상당 기간의 처가살이를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태종 14년 1월 기묘에는 ‘혼례는 구속을 좇아 남자가 여자 집으로 들어가 자식을 낳아 손에 이르도록 외가에서 자란다’고 하였고 성종 21년 6월 무신에도 ‘처가를 집으로 삼아 처부와 처모를 부모처럼 섬긴다’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파평윤씨가 문중묘역에 묻힐 수 있었던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안동대 박물관 소장 이응태 묘 출토 언간을 통해서도 확인된 바 있으며 이 풍습은 상당 기간 존속하였던 것이다. 또한 제례에 있어서도 중종 11년 10월 을사 기록에 사대부가 후손이 없는 경우라도 달리 후사를 세우지 않고 딸로 하여금 제사를 주선토록 하였다.


2. “폐조(연산군)의 유습” 사라능단 사용


명대의 직물로 대표되었던 사라능단의 금제는 역대 왕조마다 수 차례에 걸쳐 거듭된다. 그러나 특히 중종대와 명종대에 이르러서도 폐조의 유습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연산군 8년에 북경 가는 사행에 능라장을 따라가게 하여 다홍, 초록 등 여려가지 색상의 저사를 염색하여 직조도 익히도록 하였으며 10년에는 통직을 설치하고 누구나 사사로이 짜도록 하였고 흉배에 사용하는 금선은 직공 및 침선비에게 짜도록 하여 상을 주거나 못한 자는 처벌하도록 하였다. 11년에는 동.서반의 정직이면 높고 낮음에 상관하지 않고 모두에게 사라능단을 입도록 하여 이때부터 사라능단의 값이 올라 가난한 자는 여자의 옷(감)으로 단령을 만드니 반 너머가 모두 원삼이라 하였다. 계속해서 직조장인을 수 백명으로 늘리고 전습토록 하였으며 10년을 기한으로 한다면 궁벽한 시골이라도 모두 알게 되어 공사가 풍족할 것이라 할 정도로 적극적인 정책을 시행하였다.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즉위 초부터 사라능단의 사용은 사치금제의 대상으로 논의되었다. 중종 3년 ‘폐조 때는 규제가 없어 사치가 습관화되었다’하였고 4년에는 혼인에 사라능단을 사용하는 자에게 장 100대에 처하도록 하였다. 11년에는 서인에 이르기 까지 착용되자 논의가 계속되어 종실, 재상과 사족 부녀들의 표의로 국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5년 상소문에는 천한 사람들이 금선단으로 만든 신발을 신을 정도로 세속의 사치가 확산되고 있음을 우려하였다. 명종 대에 와서도 당상관의 사라능단 착용은 조종조의 구법이며 폐조로 인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사라능단의 필단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본 유물들에도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 표의적 기능의 치마 저고리 중심 복식구조


당시의 여복구조가 치마 저고리 중심으로 되어있음이 확인되었으며 저고리류는 외의 및 표의적 기능으로 착용되었다. 고급비단을 사용하여 장식된, 길이가 다른 저고리류가 많아 매우 화려하다. 저고리 종류가 다양한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단저고리로 유형 분류된 낮은 신분의 일선문씨의 저고리는 여러 조각의 비단을 이어서 만들었다. 다양한 명칭만큼이나 종류도 다양하였다.

당의, 곁막이, 회장저고리, 장저고리, 저고리, 단저고리(작은저고리), 한삼, 적삼 등의 명칭이 확인된다.


4. 사계절용 장의착용과 남.녀용 구분 기준


장의는 사계절용으로 조선 말기 두루마기와 같은 용도로 계절에 맞게 착용되었다. 문단이나 명주, 모시가 사용되었으며 일선문씨나 이응태 묘에서 출토된 장의에는 필단이 사용되지 않아 신분에 따른 차이를 보였다. 여성용 장의의 특징은 예외는 있으나 문단을 사용하거나 거들치형 넓은 끝동과 소형 삼각무에 장식성이 나타난다. 장의는 저고리를 길게 한 형태와 유사하다. 깃달이에 차이를 보이지만 일선문씨 단저고리는 장의와 동일하게 되어있다. 이러한 사항을 참조하여 남자 저고리와 같이 일색의 장의가 남자 장의로 추정된다.


5. 의례용 치마의 디자인


이 시기의 치마류는 의례용과 평상용의 구분이 확실하다. 전단후장의 의례용 치마는 뒤를 길게 끌리게 하여 여성적인 우아함을 느끼게 한다. 파평윤씨 치마류가 출토되기 이전에는 오른쪽 여밈의 치마와 왼쪽을 향하는 주름방법 등 공통적인 특징을 보여왔다. 그러나 파평윤씨에서는 주름방향이 오른쪽을 향하고 있고 왼쪽 여밈으로 보이는 치마가 함께 보임으로써 원칙보다는 실용적인 측면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6. 안정된 사회상 반영


여복의 구조와 구성적 특징으로 미루어 당시 사회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안정적인 생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묘주가 상류계층으로 국한되어 있지만 금선단을 비롯하여 고급 비단류가 다량으로 사용되었고 전단후장의 긴 치마는 안정된 사회적 배경에서만이 착용이 가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7. 남녀복식의 동조성 확인


당시 여복은 남성의 복식과 동일한 구성이 확인된다. 공동으로 착용하는 남녀 복식류가 상의와 하의, 포제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김은정, 2001 ‘조선시대 남녀공용 의복에 관한 연구’ 가톨릭 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중) 이들 복식 중에는 바지나 적삼, 한삼의 경우처럼 남녀용의 구분이 애매할 정도로 동일한 구성을 보이는 것도 있다. 신체보다 크고 넓게 만든 것으로 이를 통하여 남녀를 균등하게 대우하고 있는 배경으로 볼 수도 있다. 후기에는 남녀복의 구분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남녀복을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는 서양복의 경우와 정반대적 해석이다.


8. 궁중과 민간의 공통적인 장속


‘450년만의 외출’로 유명한 이응태 부인의 편지를 비롯하여 성별이 다른 복식류가 포함되어 있다. 의인왕후의 <빈전도감의궤> 염습의대 가운데 도포와 첨리가 대렴과 소렴에 사용되었다. 이는 공통적인 장속으로 볼 수 있다. 조선초 <국조오례의> 권5 흉례 염습의에서 왕과 사대부의 절차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인 구조는 유사하다. 전통적으로 부모의 상을 당한 슬픔은 상하가 있을수 없다고 여겨왔다.


9. 단령 착용설 제시


여성이 수의용으로 단령을 착용하고 출토되어 생전시 착용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이 가설은 한계가 있다. 현재 수의용 상복으로만 출토되어 ‘여성불습남복’의 장속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파평윤씨 모자 미라 종합 연구 논문집 중 <16세기 출토 여복의 복식사적 고찰>

박성실

단국대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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